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버트 스콧 (문단 편집) === 사망 === [[파일:image-1-for-captain-scott-gallery-695556396.jpg|width=350]] (마지막 일기의 일부분) 3월 29일 남긴 마지막 일기는 다음과 같다.[* 그 외에 사람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작성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실패 원인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https://www.spri.cam.ac.uk/museum/diaries/scottslastexpedition/category/chapter-xx-the-last-march/|#]]] > Thursday, March 29. Since the 21st we have had a continuous gale from W.S.W. and S.W. We had fuel to make two cups of tea apiece and bare food for two days on the 20th. Every day we have been ready to start for our depot 11 miles away, but outside the door of the tent it remains a scene of whirling drift. I do not think we can hope for any better things now. We shall stick it out to the end, but we are getting weaker, of course, and the end cannot be far. It seems a pity but I do not think I can write more. R. Scott. > "3월 29일 목요일. 21일 이후로 남서남과 남서 방면에서 계속해서 강풍이 불어닥치고 있다. 20일에 우리에게는 두 잔의 차를 끓일 연료와 이틀 분량의 날것의 식량 뿐이었다. 11마일 떨어진 우리 창고로 가려고 매일 준비했었지만 텐트 밖은 몰아치는 눈보라 뿐이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긍정적인 상황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끝까지 버티겠지만 우리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끝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슬프지만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 - 로버트 스콧" >[[유언|'''For God's sake look after our people.''']] >[[유언|'''우리 국민들을 굽어 살피소서.''']] '''이 문장을 끝으로 스콧의 탐험 일지는 끊겼다. 세 명 모두 동사한 것이다.''' 그리고 약 8개월 남짓 뒤, 스콧 탐험대를 구조하기 위해 파견된 후발대가 스콧과 바워스 소위, 윌슨 세 사람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 후발대에는 지원대로 탐험 초기에 참가했다가 스콧의 지시에 따라 도중에 기지로 복귀한 7명[* 이중 1명이 훗날 어니스트 섀클턴과 함께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구조 요청을 하러 떠난 무모한 인물 5인중 한명인 [[톰 크린]]이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앱슬리 체리개러드(Apsley Cherry-Garrard/1886~1959)의 회고록에서 세 사람의 주검을 발견했을 당시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912년 [[11월 12일]] 정오 쯤, 우리는 마침내 그들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혹독한 눈보라가 모든 걸 덮어서 거대한 눈구덩이로만 보였기에,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곳은 윈튼 캠프로부터 12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눈을 헤치고 보니 천막이 보였다. 천막 위에는 약 2~3피트는 됨직한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천막이 무너지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그걸 보고 난 짐작했다. '이들은 죽었구나'. 천막 입구 바깥에는 두 쌍의 스키 스틱이 눈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천막 안을 열어봤다. 안에는 바워스 소위와 윌슨이 침낭 속에 누워 있었고, 스콧은 등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름을 불러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셋 다 눈을 감고 잠을 자는 듯이 편안해 보였다. 윌슨과 바워스 소위는 기도하듯이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있었고, 스콧은 평생의 친구이던 윌슨에게 왼손을 내민 채로 굳어 있었다. 스콧의 곁에는 작은 가방이 있었는데 안에는 탐험 기록이 꼼꼼하게 적혀있는 세 권의 공책이 들어 있었다. 바워스 소위의 기후 관련 기록은 3월 13일까지 적혀 있었다.(중략) >해군 [[군의관]] 에드워드 앳킨슨(Edward L. Atkinson/1881~1929)이 고린도전서에 나온 장례식 구절을 손수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있던 자리에 그들을 묻었다.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장례식]]을 끝내고 보니 어느 새 자정이 되었다. [[파일:attachment/e0006522_4eb76e1b26aa0.jpg]] 그렇게 마지막 남은 세 사람도 남극에 묻혔다. 극지방의 추위 속에 장기간 방치된 시체는 100~200㎏이 넘는 무게가 나가서 시체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도 무리이기 때문이다. [[파일:attachment/e0006522_4ebc9a3974d22.jpg]] 그리고 그들의 유품은 영국 탐험대의 전초 기지였던 윈튼 캠프(사진)로 옮겨졌고, 이 오두막은 탐험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스콧 탐험대 기념관'이 되어 있다. 스콧 탐험대는 마지막까지 자신들이 저장고에서 17.7㎞ 떨어져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실은 서쪽으로 '''800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제대로 방향을 잡아 800m만 더 갔으면, 조금이나마 식량과 연료를 얻어서 생환했을지도 모른다. 전초 기지인 윈튼 캠프까지는 19.3㎞만 가면 되는 위치였으니. 물론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 겨우 800m가 그들에겐 800km처럼 느껴졌을테지만 이걸 알았더라면 희망으로 힘을 냈을테니 후세에 안타까움을 준다. 문제는 저장고를 찾지 못한 것도 스콧이 자초한 일이었다는 것. 아문센은 제 아무리 어떤 눈보라가 와도 눈이 쌓여도 생필품 저장고를 찾을 수 있도록 큰 깃발을 높이 세우고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지만, 스콧은 그런 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문센은 개썰매를 운용했으므로 개들이 냄새를 맡고 저장고가 있는 정확한 지점으로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스콧은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